姓 名:徐太志
英文名: XuTaiZhi
国 家:韩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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粉丝
138
歌曲
56
专辑
56
评论

中文名:徐太志(徐泰智)
英文名:Seo,Tai-Ji
原名:郑铉哲
生日:1972-02-21
出生地:首尔(汉城)
家庭关系:父母,姐姐
身高:172cm
体重:55kg
出生地:汉城
血型:O
视力:0.4
喜欢的颜色:黑红黄
专长:跆拳道
酒量:完全不懂得喝
爱好:模型飞机及模型制作,玩模型车(他的R/C)
性格:布满好奇并且爱玩,但是对于音乐十分严谨及固执
最兴奋的时候:自己创作的歌曲获得第一名的时候
音乐之外最想从事的职业是:玩具店老板
失败的公演经历:没有过
初恋:初中一年级时,也一个漂亮女孩交往,后因学习而分手
怎样的恋人最好:对小孩有爱心
家庭计划:只要一个小孩
喜欢的食物:猪排
最珍惜的是:录音室里的音乐器材
临死前假如给你30秒的时间延迟的话会做什么:殴打死神
作品:1990年以“Sinawe”出道乐坛,除了“徐太志和孩子们”和Taiji Band的七张正规唱片之外,还发行「LIVE & TECHNO REMIX [live]」、「'93最后的庆典 [live]」、「Seotaji and Boys」、「'95敞开另一片天空 [live]」、「Goodbye Best Album」、「时代遗憾」、「太志的 话 - Live Album 2000-2001 [live]」、「Maxi single」、「Seo Taiji 6th Album Re-recording & ETPFEST Live」、「LIVE TOUR ZERO 04 [live]」等在内的多张非正规专辑。
自九十年代起,韩国的音乐突飞猛进,不单冲出了亚洲,也变得紧贴世界市场,足长的进步,令人刮目相看。
韩国乐坛的进步,当然不可能是一个人的功劳,但相信大多数人都同意,在带领韩国音乐走向世界这一环上,Seo,Tai-Ji(徐泰智/徐太志)功不可没。
1972年出生的SEOTAIJI,自小对音乐有浓厚的兴趣,并不特别喜欢念书的他,14岁起,已和朋友组成业余乐队天上壁(Haneul Byuk)及活化山(Hwalhwasan),到了17岁,SEOTAIJI加入摇滚乐队夕那雨(Sinawe),1990年,夕那雨推出令他们声名鹊起的「Set My Fire」,但一曲成名后,夕那雨宣布解散,成员各奔前程。
80年代末期,西方乐坛开始流行Hip Hop及Rap,SEOTAIJI决心以他多年的音乐经验,为韩国导入并改革西方的Hip Hop及Rap。92年,只有20岁的他,找到了两位男孩街舞高手,组成了“Seotaiji and Boys”。
同年3月,SEOTAIJI首创以韩语Rap歌,并以韩国传统乐器胡笛伴奏,配合他们的Hip Hop舞艺,立刻风靡万千韩国年轻人,首张唱碟《我明白》(난 알아요),劲销180万张!
未几,SEOTAIJI以摇滚乐形式,重新演绎韩国传统诗歌「何如歌」(하여가),轰动乐坛;接着的是他批判教育体制和政府的现实主义作品「教室的理念」(교실이데아),韩国乐坛因SEOTAIJI的出现,不单在音乐形式上,在歌曲的取材上,亦掀起了天翻地覆的变革。
95年,Seotaiji and Boys宣布解散,96年,他以创作艰难为由引退,随即隐居美国。多年来,他的后继者虽然无数,但他在韩国人民心目中那【现代音乐之王】的地位,始终无可取代。
经过了漫长的等待,SEOTAIJI终于鸟倦知还,在美国四年多的生活体验,令他的音乐灵感再次源源不绝。2000年9月,SEOTAIJI正式重返韩国乐坛,在汉城奥林匹克体育馆举行了一场回归演唱会。当晚的歌迷,每人手上都系着一条黄色手帕,相传是韩国女子在迎接已离家多年的丈夫时,用来表示她的心始终未变。
SEOTAIJI不爱宣传,也没有华丽的外表,退隐多年,但仍稳站歌迷心中高位,只因为他的音乐从来没有令人失望过!
출생 1972년 02월 21일 / 서울, 대한민국
데뷰 (Debut) 1989년 (시나위 베이시스트)
취미 모형비행기 날리기
학력
-서울 재동초등학교 졸업
-서울 대동중학교 졸업
-서울북공업고등학교 중퇴
가족 1남 1녀 중 장남
신체조건 173cm, 55kg
프로필
- 좋아하는 음식 : 돼지갈비
- 친한 연예인 : 양현석; 김종서
- 좋아하는 색깔 : 검정, 빨강, 노랑 매력포인트 : 하얀 피부
- 버릇 : 항상 걷거나 차 안에서 까지 노래와 랩을 중얼거려 정신나간 녀석으로 오해 받기도함
1990년대 대중음악의 흐름을 뒤바꾼 놀라운 뮤지션. 서태지는 국내 메탈그룹의 대표적 주자였던 '시나위'에서 2년 동안 베이시스트로 활약하며 탄탄한 음악적 기본기를 다졌다. 1990년에 발표한 시나위 4집앨범에 참여한 후 김종서와 함께 시나위를 탈퇴, 1991년에 이주노(본명 이상우), 양현석과 함께 댄스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 3월 29일 TV 무대에 처음 나선 이들은 파격적인 춤과 랩이 혼합된 새로운 형식의 음악으로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을 일으키며 일약 우상으로 떠오른다.
1996년 1월 31일에 돌연 은퇴를 선언한 서태지는 미국에서 은둔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98년 7월 7일 20억원이라는 거액의 금액을 받고 삼성뮤직에서 [SEO TAI JI]를 발표, 또한번 서태지 신드롬을 일으켰다.
서태지는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거대한 뮤지션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90년대 한국 대중문화를 주도한 태풍의 눈이었다. 그러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는 본질적으로 록 뮤지션으로서의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과 대중성의 결합에 대한 음악적 고민, 댄스 팀이라는 태생적 한계(<필승>'에서 댄서 출신의 멤버들에게 악기를 쥐어 주는 고육지책이란!)와 함께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의 약화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솔로로서의 서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과는 달리 대중문화의 주도적 아이콘이라기보다는 또 한 명의 재능 있는 록 뮤지션으로서의 새 출발을 의미한다.
서태지의 1집은 향후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앞으로 그가 수행하게 될 음악 활동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다. 이제 그는 한국의 대중음악 신을 좌지우지하는 혁명 전사가 아닌,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많은 뮤지션 중 하나일 뿐이다.
서태지의 첫 솔로 앨범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거니와, 같은 이유로 그음악의 파격적 변모에 그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Take one부터 six까지 그대로 이름붙인 트랙들은, 흔히 얼터너티브 록이라고 알려진 음악적 요소를 채용하여 매우 불친절하고 내성적인 음악을 담고 있다. 다소는 사이키델릭하면서 전체적으로 무겁고 음울한 색채를 띄고 있으며, 선이 굵은 기타 리프가 시종 리드하는 가운데 가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불분명한 발음의 보컬이 다소 느린 템포의 리듬 속에 묻혀 있다. 한국 록 씬에 있어서의 독특한 장르적 취향과 완성도와 함께, 솔로 뮤지션으로서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는 자기 자신의 음악을 펼쳐 보이겠다는 서태지의 출사표와도 같은 성격의 앨범이다.
앨범 발매를 전후해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았던 1집 때와는 달리, 2000년 두 번째 앨범 「울트라맨이야」와 함께 서태지는 방송활동, 투어를 포함한 본격적인 솔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이 앨범의 음악적 테마는 하드코어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과 마찬가지로, 이 앨범은 1집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전혀 다른 음악이다. 강력한 메탈 사운드에 랩, 노래 등 그의 장기인 다양한 스타일의 보컬을 선보이고 있으며, 1집의 내향적인 모습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힙합의 그루브보다는 메탈 본연의 하드함에 더욱 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보컬 스타일에서 분명 콘(Korn)의 영향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음악이 단순히 Korn의 아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서태지는 확실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름대로 최상의 결과물을 도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이 쪽 계열의 음반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어 있는 데다, 국내에서도 이미 비슷한 음악을 구사하고 있는 밴드가 존재해 왔다는 현실을 고려하면 서태지의 선택이 결코 혁신적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그 이유로 서태지 고유의 스타일이 녹아 있는 이 음반을 폄하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서태지는 저력 있는 록 뮤지션이다. 1집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 낸 연주는 물론 프로듀싱, 편곡 등도 특별히 흠잡을 데가 없을 만큼 탁월하다. 역시 서태지의 가장 큰 장점은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본인의 스타일로 소화해 낼 수 있는 음악적 재능과 센스인 것이다. 한국의 주류 뮤지션이 모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이 정도 수준의 하드코어 앨범을 발표한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예외적인 케이스라고 봐야 하지만 그만큼 서태지의 위력을 실감할 수밖에 없다. 재능있는 록 뮤지션의 성공적인 귀환.
2002년도에 서태지는 2003년에 있을 새 앨범 발표를 앞두고 한국, 미국, 일본의 거물급 아티스트가 참여한 '2002 ETPFEST'라는 대형 록 페스티발을 주최하기도 하였다. 2장의 솔로 앨범을 통해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광범위한 대중적 성공 대신 록 뮤지션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고 있는 서태지의 활동은, 언더그라운드의 자생적인 게릴라적 록 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한국 록의 활성화에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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